
솔직히 저는 수비드(sous vide)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집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껍질 달린 오겹살을 들고 직접 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건 단순히 편한 조리법이 아니라, 고기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경험이라는 것을.
껍질 달린 오겹살, 그리고 24시간의 선택
마트에서 고기를 고르다가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껍질 있는 오겹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껍질이 붙어 있으면 손질이 번거로울 것 같아서 피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 쫀득한 식감이 궁금해졌습니다. 충동에 가까운 선택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반으로 잘라보니 지방층이 꽤 도톰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방과 살코기가 거의 일대일에 가까운 비율이었는데, 순간 "이거 너무 느끼한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그 자체로 이미 실험이 시작된 기분이었습니다.
수비드 조리를 위해 온도와 시간을 정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수비드(sous vide)란 진공 포장한 식재료를 일정한 온도의 물속에 장시간 담가 저온에서 천천히 익히는 조리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고기를 물속에서 정밀하게 익히는 방식입니다. 삼겹살은 지방 비율이 높은 부위여서 수비드 온도와 시간에 대한 의견이 유독 다양합니다. 해외 여러 수비드 연구 자료를 뒤지다 보니 네덜란드의 한 블로거가 8가지 레시피를 직접 비교 시도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론은 74도, 24시간이었습니다. 코멘트는 단 두 단어, 텐더 앤 쥬이시(tender and juicy). 부드럽고 육즙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 두 단어에 설득당해서 바로 그 조건으로 결정했습니다.
진공 포장(vacuum sealing)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진공 포장이란 봉지 안의 공기를 완전히 빼서 식재료와 비닐 사이에 틈이 없도록 밀봉하는 방식입니다. 지퍼백도 단시간 수비드에는 충분하지만, 12시간이 넘어가는 장시간 조리에서는 이음새가 손상될 수 있어 전용 진공 비닐을 쓰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장시간 조리에서 지퍼백을 쓰다가 한 번 낭패를 봤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처음부터 진공 비닐로 준비했습니다.
74도 24시간, 온도와 시간이 만드는 질감의 차이
고기를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 준비했습니다.
- 오리지널 버전: 소금과 후추만 뿌리고, 냉동 보관해 둔 대파와 마늘 5개를 함께 진공 포장
- 김치말이 버전: 별도의 시즈닝 없이 김치 4분의 1 포기만 고기에 감싸서 진공 포장
사실 김치말이는 계획된 메뉴가 아니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다가 "이걸 같이 넣으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손이 이미 김치를 들고 있었습니다.
24시간 뒤 봉지를 꺼냈을 때 솔직히 처음 반응은 좀 밍밍했습니다. 겉모양만 보면 그냥 삶은 고기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칼을 넣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항감 없이 스르르 들어가는 그 느낌이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의 부재입니다. 마이야르 반응이란 고온에서 고기 표면의 단백질과 당이 반응해 갈색 껍질과 특유의 구운 향을 만들어내는 현상입니다. 수비드는 이 과정이 없기 때문에 겉면이 회백색으로 유지됩니다. 보기엔 밋밋하지만, 그 대신 내부 온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면서 육즙 손실이 최소화됩니다. 저온에서 장시간 가열하면 콜라겐(collagen)이 젤라틴으로 전환되는데, 콜라겐이란 고기의 결합 조직을 이루는 단백질로, 이것이 젤라틴화될수록 고기가 부드럽고 촉촉해집니다. 74도에서 24시간이라는 조건이 바로 이 전환을 충분히 일으키는 설정입니다.
저온 장시간 조리가 육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관련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한국식품연구원에 따르면 돼지고기의 저온 장시간 가열은 근원섬유(myofibril) 단백질의 변성을 최소화하면서 결합 조직을 효과적으로 분해해 전단력을 낮춘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식품연구원). 전단력이 낮다는 건 쉽게 말해 칼로 자를 때나 씹을 때 힘이 덜 든다는 뜻입니다. 제가 칼을 넣었을 때 그 낯선 감촉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오리지널 vs 김치말이, 먹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첫 한 점은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그냥 먹었습니다. 씹자마자 입안에서 풀어지는 그 식감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부드럽다"는 표현이 부족하다는 게 이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결이 느껴지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방층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코기와 섞이면서 고소함을 훨씬 부드럽게 감싸줬습니다.
그다음으로 김치말이를 먹었을 때는 완전히 다른 음식이었습니다. 같은 고기, 다른 재료는 김치 하나뿐인데 맛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김치가 닿은 부분은 감칠맛이 깊어져 있었고, 특히 지방 부분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오리지널이 고소함 중심이라면, 김치말이 쪽은 훨씬 입체적인 맛이었습니다. 김치찌개나 김치찜의 향이 고기 안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하면 가장 가까울 것 같습니다.
수비드 후 표면에 짧게 시어링(searing)을 더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시어링이란 팬이나 토치를 이용해 고온에서 표면만 빠르게 구워 마이야르 반응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내부는 수비드로 완벽하게 익히고, 겉은 시어링으로 구운 향을 입히는 방식은 레스토랑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저는 이번엔 수육으로 즐겼지만, 다음번에는 시어링을 더해볼 생각입니다.
수비드 조리의 식품 안전성 측면도 짚어볼 만합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에 따르면 돼지고기의 중심 온도는 75도 이상에서 1분 이상 유지하는 것을 권장합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74도 24시간 조건은 이 기준에 준하는 온도를 장시간 유지하는 방식으로, 저온이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확보된다면 안전성 면에서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 해보고 나서 한 가지 솔직한 생각이 남았습니다. 결과물은 분명 훌륭합니다. 그런데 요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냄새, 지글거리는 소리, 불 앞에서 타이밍을 맞추는 그 감각들이 수비드에는 없습니다. 온도 맞추고 넣어두면 끝이라서, 먹을 때 "내가 만든 요리"라는 느낌보다 "기계가 잘 해준 결과물"이라는 기분이 아주 조금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두 가지를 번갈아 합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수비드로 천천히,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굽고 싶을 때는 팬 앞에 서서 바로 익힙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날 제가 원하는 맛과 분위기에 따라 고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삼겹살 수비드를 처음 시도해 보신다면, 74도 24시간을 기준점으로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오리지널로 한 번 먹어본 뒤 김치를 곁들여 먹어보면, 같은 고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접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엔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 자연스럽게 감이 잡힐 것입니다.